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k20220611_172440.jpg|width=565]]|| || 국립중앙박물관 염거화상탑 설명판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높이 1.7 m인 [[화강암]]제 승탑이다. 본 승탑은 기단부터 몸돌과[*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 지붕돌[*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까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고 칭한다.[* 각 기단, 몸돌, 지붕돌 등을 바닥과 평행하게 자른다고 쳤을 때, 그 단면이 8각형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0802&cid=40942&categoryId=31543|두산백과 - 팔각원당형 승탑]]] 다만 기단 밑의 바닥돌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나,[*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95&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탑]],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14936&cid=51293&categoryId=51293|e뮤지엄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전체적으로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여전히 아름다운 석탑이다. 몸돌 아래의 기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윗돌, 가운데돌, 밑돌로 구분한다.[* 혹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선 기단을 상대석, 중대석, 중대받침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671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다만 염거화상탑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니라서, 기단의 밑돌 아래에 또 바닥돌이 있어서 사실 이것이 밑돌이었고, 본 승탑을 원위치에서 옮기던 중 소실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염거화상탑과 [[쌍봉사#s-3|쌍봉사 철감선사탑]]을 비교해 살펴보면, 염거화상탑에도 본래는 밑돌(바닥돌)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물론 원래부터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는 밑돌 아래에 정사각형의 바닥돌을 새로 깔아놓았다. ||[[파일:국보104호전원주흥법사지염거화상탑02.jpg|width=565]]|| || 염거화상탑 기단부 || 기단 맨 아래 밑돌 부분(혹은 중대받침)의 측면 8개에는 각각 사자상이 새겨져 있으며,[* 풍화에 의해 사자들의 형태가 그다지 뚜렷하지는 않다.] 그 위에는 3개로 이루어진 작은 계단형 단을 마련했다. 이 3단 위에는 [[향로]]와 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8개의 면으로 구성된 가운데돌(중대석)이 있다. 윗돌[* 가운데돌 위부터 몸돌 아래 까지를 윗돌이라 하는데, 참고 문헌에 따라 이 부분을 '2단으로 된 윗돌' 혹은 '상대석과 탑신굄돌'로 상이하게 구분한다. 본 문서에서는 전자의 시각을 따르도록 한다.]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윗돌의 아랫부분 중 가운데돌과 닿는 지점에는 3개로 된 역계단형 단을 새겼다. 특히 윗돌의 아랫부분은 전체적으로 두 줄로 된 둥글넓적한 [[연꽃]] 무늬가 뚜렷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연꽃 무늬는 위아래로 각각 16개씩 새겨져서 측면을 원형으로 빙 두르고 있다. 또한 연꽃 무늬의 위로는 2단의 계단형 단이 만들어져서 윗돌의 윗부분과 만난다. 윗돌의 윗부분은 가운데돌처럼 8개면에 장식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천부상(天部像)들이 조각되었다.[* 참고문헌에 따라서는 비천상으로 보기도 한다.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95&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탑]]] 윗돌 윗부분과 몸돌이 만나는 곳에는 역시 아래 부분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2단으로 된 계단형 단을 만들었다. ||[[파일:국보104호전원주흥법사지염거화상탑03.jpg|width=565]]|| || 염거화상탑 몸돌과 지붕돌 || 염거화상의 [[사리(불교)|사리]]가 모셔졌던 몸돌은 역시 8각형으로 되었으며, 각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기둥 장식[* 이를 우주(隅柱)이라고 한다.]을 새겨 서로 구분하였다. 또한 몸돌의 앞뒤로 문을 하나씩 새겨서 총 두개의 문이 있고[* 이렇게 새겨진 문 장식을 문비(門扉)라고 한다.] 그 문의 양옆에는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총 8개의 면 중에 6면에 문과 사천왕 등의 장식이 있고 나머지 2면에는 장식이 없다.] 문과 사천왕 모두 돋을새김으로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문의 경우 자물쇠와 문고리 뿐만 아니라 문 위에는 꽃 무늬가 새겨진 굴곡이 있는 아치형 장식까지 만들었다. 사천왕들은 대좌 위에 올라가 각기 상징하는 무기를 쥐었는데 형상이 아주 사실적이다. ||[[파일:국보104호전원주흥법사지염거화상탑04.jpg|width=565]]|| ||[[파일:k20220611_172554.jpg|width=565]]|| || 염거화상탑 지붕돌 처마 부분의 비천상 비천상 아래에는 문과 자물쇠, 문고리, 꽃 무늬가 새겨진 아치형 장식이 있다. || 몸돌 위에는 역시 팔각으로 된 지붕돌이 올라가 있다. 이 지붕돌 역시 그 묘사 정도가 상당히 섬세한데, [[기와]] 사이의 기왓골도 하나하나 표현해 놨으며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도 하나하나 만들었다. 또한 지붕 위에 [[잡상]]을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671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다만 잡상은 고려시대 건축에 들어서야 그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잡상의 흔적이 아닐 수도 있다.] 지붕의 기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붕 밑에는 [[처마]]까지 만들어놨는데 여기에는 비천상 조각들이 숨겨져 있다.[* 비천상은 처마의 모든 면은 아니고 한 면 씩 건너 뛰어서 총 4면에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실제 목조 건축의 여러 디테일들을 사실적이며 충실하게 표현해놔서, 본 승탑은 신라시대 건축물의 지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다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지붕돌 위에 있던 상륜부를 분실했다가 다행히도 2018년도에 다시 찾아 복원했는데, 문제는 일제강점기 때 찍힌 사진에 있는 모습과 현재 복원한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상륜부를 분실 하기 전에 이를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보면, 상륜부는 3단(보륜(寶輪)-복발(覆鉢)-보륜)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공모양의 복발을 돌기가 돌출된 보륜들이 위아래로 감싸고 있던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복원해 놓은 모습은 보륜-보륜-복발의 상태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복원했는지 그 이유는 불명확하다. 어쨌든 잃어버렸던 상륜부를 찾아서 세부적인 모습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며, 이는 다른 승탑들의 상륜부 형태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671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이외에도 염거화상탑은 제작시기와 탑에 모셔진 사리의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탑골공원에서 경복궁으로 염거화상탑을 옮기면서 승탑 내부에서 [[동제염거화상탑지]]가 발견되어 본 승탑의 제작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동제염거화상탑지는 동판에 염거화상탑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새긴 것이다. >會昌四秊歲次甲子季秋之月兩旬九日遷化廉巨和尙塔去𥼶迦牟𡰱佛入𣵀槃一千八百四年矣 >회창사년세차갑자계추지월양순구일천화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입열반일천팔백사년의 > >當此囯慶膺大王之時 >당차국경응대왕지시 >---- >회창會昌 4년 간지가 갑자이던 해 9월 29일에 천화한(돌아간) 염거화상의 탑으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지 1804년이 지나서인데, 이 나라 경응 대왕(문성왕)의 때이다. > >동제염거화상탑지 명문[* 해독한 명문과 번역문의 출처: <국립춘천박물관 소장품 조사연구보고서 I: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 2014, 국립춘천박물관, 150쪽] 명문에 염거화상탑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본 승탑에 모셨던 사리가 염거화상의 것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이미 이 시기부터 승탑을 탑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회창(會昌)은 [[당나라]] [[무종(당)|무종]]의 연호로 염거화상의 입적 시기를 회창 4년 [[갑자]](甲子)로 적었는데, 회창 4년은 서기 844년으로 간지는 갑자이며,[*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갑자|한국어 위키백과 - 갑자]]]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응(慶膺)은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이름이므로 문성왕 6년임이 분명하다. 2014년에 국립춘천박물관이 발간한 조사보고서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에 실린 논문 "염거화상탑지와 탑에 대한 고찰"의 저자 강삼혜 학예연구사는 논문에서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했고 화상의 승탑을 855년에 완성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염거화상탑/탑지를 조성한 때를 855년으로 본다. 자세한 내용은 [[동제염거화상탑지]] 항목 참조. ||[[파일:k20220611_172836.jpg|width=450]]||[[파일:k20220611_172814.jpg|width=450]]||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20세기에 들어서 이리저리 떠도는 수난을 겪으면서 본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됐으며 일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어 안타깝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고 승탑 그 자체의 우아한 기품과 섬세한 형태 그리고 청아한 조각 솜씨를 잘 간직하고 있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197&cid=42840&categoryId=42848|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9964&cid=40942&categoryId=33380|두산백과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또한 승탑 내부에 동제염거화상탑지라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전해져서 승탑의 주인과 제작 연대가 명확하고, 현전하는 승탑 중에 건립 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 연도도 확실하여 한반도 불교 미술 연구에 중요한 기준 중 하나를 제공한다. 또한 염거화상탑은 승탑 제작에 있어서 팔각원당형이라는 일종의 표준형이자 [[프로토타입]]을 제시해서, 이후에 만들어진 신라 승탑들[* [[쌍봉사#s-3|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구례 연곡사 동 승탑]] 등] 뿐만 아니라 한반도 승탑 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이와 같은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